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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반격 그리고 70년
    핫 키워드 비하인드 스토리 2023. 6. 20.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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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을 떠받친 주역들

    한국군은 북한의 남침 시 일시 후퇴하여 북한군을 남한 깊숙이 끌어들였다가 반격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강이 1차 방서선, 금강이 2차 방어선, 낙동강이 3차 방어선이었습니다.

    북한군에 밀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에서 9월 중순까지 낙동강전선에서 북한군과 혈전을 계속하였습니다.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미군은 북한군에 맹폭을 퍼부었으며 지상에서는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을 저지하였습니다.

    특히 대구로 통하는 전술적 요지인 대구 북방 22km 지점의 칠곡군 다부동에서는 55일간이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고지를 10여 차례나 뺏고 빼앗기며 북한군 2만 4천여 명, 국군과 유엔군 1만여 명의 사상자가 나온 전투에서 국군 1사단은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며 대구를 고수하는 데 크게 기여합니다.

    이 당시 전선의 상황이 너무 급해 학도병 등으로 신병을 받아도 이들을 제대로 훈련시킬 여유가 없었으며 이들은 겨우 3~4시간 동안 기본적인 소총 사격훈련과 수류탄 투척 요령만 습득한 뒤 곧바로 전선으로 투입되었습니다. 희생자는 계속 늘었고 "고문관"으로 불리는 신병들은 계속 도착했습니다. 한바탕 격전을 치르고 나면 부대원의 30~40%가 사라졌습니다.

    나중에는 분대장이 자신에게 배속된 분대원의 얼굴과 이름도 모른 채 전투에 나서는 지경에 되었습니다. 군적도 없이 죽어간 무명용사들, 그들은 대한민국의 오늘을 떠받친 주역입니다.

     

    대반격

    맥아더가 이끄는 UN군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합니다. 유엔군 상륙부대가 한반도 중부에서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면 낙동강전선의 유엔군이 대반격을 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이 군사/전략적으로 갖는 가장 큰 의미는 전세를 일거에 전환시켰던 터닝포인트라는 것입니다.

    북한군의 기습공격에 의해 한국군이 수세에 몰렸고 낙동강 방어선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 일거에 전세를 전환시켰던 가장 중요한 작전 중의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상륙작전 후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어 유엔군과 국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합니다.

     

    서울수복 그리고 북진

    이승만은 북한의 침공으로 38선은 없어졌으며 이 기회에 북한 정권을 몰아내야 한다고 생각해서 9월 말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한국군 지휘관 회의를 소집하여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북진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에 따라 10월 1일 강릉 방면의 국군 3사단이 최초로 38선을 넘었고 그 뒤 유엔 총회가 이를 추인하였습니다.

    10월 19일 국군 1사단이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합니다. 국군 중 선두 부대는 압록강에 도달했고 유엔군도 한반도에서 공산군을 몰아내기 위한 마지막 공세에 몰입했습니다. 모두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실패로 끝난 크리스마스공세

    멸말위기에 몰린 김일성은 10월 1일 다급히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에 소련과 중국은 참전을 결정합니다. 마오쩌둥은 북한이 망하면 중국도 위태로워진다 하여 당초의 약속대로 군대를 보냅니다.

    이때부터 적의 주력은 북한군이 아니라 중공군이었습니다. 이때 중공군은 일본군과 또 장제스의 국부군과 싸우면서 전투력이 한껏 강해진 군대였습니다. 소련군도 1950년 11월부터 공군을 참전케 했습니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확전 가능성을 우려하여 소련군 비행기를 중공 항공기인 것처럼 꾸몄고 조종사는 중공군 복장에 중국어를 쓰도록 교육받았습니다.

    중공군은 유엔군과 한국군이 북한 깊숙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11월1일 평안북도 운산 일대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미처 대비하지 못한 유엔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명 "크리스마스공세"였던 11월24일 최종공세에서도 큰 손실을 입은 유엔군은 남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맥아더는 중공군의 참전 숫자가 8만~12만명으로 예측했었지만 실제로는 60만 명 이상의 중공군이 참전한 것으로 확인되어 1950년 12월 25일까지 한만국경선까지 진격해서 전쟁을 종결하려고 했던 맥아더의 구상은 대규모의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좌절하게 된 것입니다.

     

    중공군의 반격 그리고 장진호 전투

    북한의 임시수도 평안북도 강계를 점령하기 위해 함경남도 장진호로 진출했던 미 해병 1사단은 10배나 많은 중공군 7개 사단의 포위 공격을 받게 됩니다.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15일간 영하 20~30도의 혹한 속에서 치른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은 3천여 명의 전사자등 사상 최악의 피해를 입었으나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성공합니다.

    결국 1951년 1.4후퇴로 서울을 중공군에 내주게 됩니다. 중공군은 경기도 평택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다시 유엔군이 반격하여 1951년 3월 15일 중공군에게서 서울을 되찾았고 여세를 몰아 3월 말에는 38선을 회복합니다.

     

    정전협정 후 70년

    1951년 4~5월 중공군의 춘계공세 이후 양측 모두 무력으로 상대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전선은 교착되었으며 휴전이 모색되었습니다. 이에 미국, 중국, 소련 모두 휴전을 원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 조건으로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전쟁도 평화도 아닌 휴전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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